광주민중항쟁의 배경

 

1. 경제적 배경

5·16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고도 경제 성장을 이뤄 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은 불균형의 심화 및 대외 종속성의 심화과정으로 특징지워졌다. 한국 경제의 재생산구조인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는 자본의 부족으로 인해 외자 도입을 더욱 증대시켰고,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정책은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선진국의 스테그플레이션의 만성화로 인한 세계무역시장의 축소, 보호무역의 강화조치로 한국경제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국 경제의 급속한 하강 곡선을 초래하였다. 이런 가운데 국내의 유신체제는 재정지원, 금융 특혜, 인위적인 독점가격형성 등으로 독점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조장하였으며, 이런 경제정책은 민중의 사회적 빈곤의 가속화로 귀결되었다.
70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그때까지 누적되어 온 사회적 모순이 기층민중, 특히 노동자층의 격렬한 투쟁으로 폭발하게 되는데 원풍모방, 동일방직사건, 부마항쟁, 사북항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민중들은 폭압적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광범위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는 곧바로 정치적 위기로 직결되었다.

2. 정치적 배경

79년 박정희는 양당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고, 기어코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키기에 이른다. 정치상황의 급박한 전개속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민중투쟁이 고양되는 과정에서 軍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은 10월 26일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가져온다.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 전두환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내부부 온건파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감행, 自派의 세력을 강화하여 권력기구들을 장악해 나가는 한편, 유신잔당을 규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하였다.
18년간의 박정희 군사정권은 붕괴됐으나 최규하의 과도정부 역시 유신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유신잔당과 군부세력이기에 자유와 민주를 요구했던 재야, 학생 민중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서울역시위 5.16 점진적으로 자기발전을 거듭했던 민중들과 지배계급과의 투쟁은 시간이 갈수록 첨예화되어 갔고 5월 16일 '유신잔당 퇴진', '계엄 철폐', '민중의 생존권 보장', '정치일정 단축'을 요구하는 서울역 시위를 정점으로 반동세력과의 직접대결로 발전하였다.
야당인 신민당은 10·26이후 분출하는 민중운동을 저버리고 투쟁성을 상실한 채, 결국은 학생들의 '계엄철폐' 등의 시위를 자제할 것을 종용하며 민중운동의 발전을 자신의 정권 장악에만 이용하려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학생운동의 경우 5월이 되자 대규모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며 정치적 선도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노동운동의 경우 '노동 기본권 보장', '어용노조 퇴진'등의 단위사업장내에서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치투쟁으로의 발전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각 부문의 광범위한 민중투쟁이 벌여졌으나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는 서울역 회 군과 같은 우를 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