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의 과정

 

10·26사태 이후 일정이 지연되자 광주시내 대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도청으로 진출, 16일에는 '민주화 대성회'라는 시국성토대회를 가진 뒤 횃불시위를 감행했다.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로 교내 출입이 금지된 전남대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9시경부터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정문에서 모이자'는 결의에 따라 500여명의 학생이 학교앞에 집결, "계엄군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학교앞에 진주하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학생들에게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를 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다. 대검에 찔려 피를 흘리며 시위대는 금남로쪽으로 쫓겨갔고 이로 인해 광주민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간다.

공수부대의 진압 18일에 일어난 공수부대에 의한 학살 소문을 접한 시민과 학생들은, 19일 금남로를 중심으로 경찰과 대치했으나, 출동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카톨릭 센터, 공동터미널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잔혹하게 유혈진압을 당했다. 또한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 시청접수, 광주 문화방송국 방화등을 통해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표출하였다. 21일, 계엄군이 발포를 개시하자 시위대는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市外 등지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무장을 하게 되는데, 이들을 시민군이라 한다. 시민군의 93%가 노동자 등의 기층민중이었으며 이들은 최후 항전까지 끝까지 남아 싸우는 투혼을 보여준다.
19∼21일, 이 시기는 민중봉기로의 발전시기로 학생은 물론 노동자, 농민, 실업자,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이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고 이에 따라 투쟁의 형태도 변화하게 된다.

시민들이 주인된 광주 21일 오후부터 22일 오전에 이르는 시위는 삽시간의 시가전 향상으로 일변하여 21일 오후 6시경 마침내 도청을 장악하고 시민군의 힘으로 22일 광주시내를 장악하게 된다.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한 조직을 편성하는 한편 '투사회보'를 발행, 선전활동을 하고 매일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 시민들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수렴하는 등 뛰어난 자치능력을 발휘했다. 이때부터 27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탱크를 앞세운 진압 전까지의 기간동안 광주시내에서는 시민군과 지도부에 의한 자치 질서가 확립되어 어떠한 무질서도 없는, 그리고 민중 스스로의 자발적 필요에 의해 모든 사회적 질서가 지켜지는, 자신의 장래를 토로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민중의 자치질서를 맛보게 된다.

도청장악 후 항쟁 지도부의 갈등과 그 극복에의 노력이 서로 교차되는 와중에서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항쟁은 종결된다.
즉, ⊙ 사태수습 전에 군투입 금지, ⊙ 사후보복 금지, ⊙ 사망자 보상 등 7개 조항의 요구 조건의 관철을 내걸고 무기 회수에 나선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와 이들의 행위를 투항주의로 규정, ⊙ 현정부의 퇴진, ⊙ 계엄령 해제, ⊙ 학살 원흉처단 ⊙ 구속인사 석방과 구국과도 정부수립 ⊙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결사항전파 와의 의견대립으로 항쟁 지도부간의 균열이 생긴 가운데, 군대에서는 강경파가 조기진압을 명령, 계엄군은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 1시간 40여분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결사대원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