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여 열사여


1988년 5월의 하늘은 마냥 높아지고 강렬한 햇빛이 저 군부독재의 가슴을 향해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것 같았다. 5월 18일 오전 11시경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끝까지 투쟁하자"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자"며 한 학생이 분신을 했다. 그가 바로 최덕수 열사이다.

그는 68년 전북 정읍시 변두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87년에 그는 단국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다. 그는 '서도회'라는 써클에 가입했으며 학과일과 동아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지난 6월항쟁을 겪으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사상들을 더욱 확고히 해나갔다. 그는 친구들과 선배들 간의 대화 속에서도 그의 사상적 의지를 확실히 주장하였다.
88년에 들어서 그는 모든 일에 남다른 정열과 적극성이 있었기에 "호남향우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학과, 동아리일, 호남향우회, 거기다가 학생운동까지 풀어나가야 하는 많은 짐을 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88년도 1학기에 들어서 가정의 경제적 사정으로 휴학을 하게 되었고 휴학초기(3월말경)까지는 학교일들을 풀어나갔다. 그 후에 그는 경인지역의 어느 공장에서 한달간 공원으로 일을 하면서 학교상황을 알고자 계속적으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정치적 상황이나 학원내의 행사때에는 꼭 학교에 내려왔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내몫까지 더 열심히 싸워달라"고 했다. 그는 공장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왔다. 그는 "공장생활이 힘들더라 우리 2천만 노동자는 이렇게 고생하는 구나"라고 친구들에게 그간 지내온 생활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후 그는 당분간 집(정읍)으로 가서 농사일을 돕겠다고 내려갔다가 17일 다시 학교로 올라왔다. 그는 '광주항쟁민족열사' 추모식때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17일 신촌에 있는 동아리 선배집에서 잠을 자고 18일 아침 9시에 학교에 왔다. 그런데 학교를 둘러보고는" 5·18 여덟돌인데 학교 분위기가 왜 이러냐" "광주항쟁의 뜻을 되새겨야 되지 않겠는냐"며 각 단과대 및 총학을 찾아가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혼자 핸드마이크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이공대 시계탑 주위에서 학우들에게 광주항쟁정신의 올바른 계승을 호소했다. "우리는 광주의 뜻을 되새겨야 한다" "광주는 아직도 살아있다."등을 외치며 준비해간 신나를 온몸에 붓고 마시며 분신을 했다.

그는 이제 광주 2,000여 영령이 살아 숨쉬는 망월동에 묻히었다. 그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날이 오면 그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 모두 그의 숭고한 뜻을 되살려야 한다.

※ 이 글은 열사께서 분신한 해 교지'단국'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