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환 섭 (관상원예학과 88)

88년 5월 18일.
오늘이 그 어느때 보다도 유난히 맑아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8년전 이 날, 계엄상태하에 있던 저 남도의 빛고을 시민·학생들은 집권 세력을 향해, 그리고 민주를 위해 민주화 요구 항쟁을 시작한 날이다. 하지만 현대는 날이 갈수록 다원화 되는 사회라 그럴까? 아니면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조금씩 무너지기 때문일까?
8년이 지난 오늘,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는 3일간의 대동제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대학에 와서 두번째로 맞이하는 대동제인데도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아직르 내 마음이 어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등교길에 써클 후배를 만나 곰상앞을 지나서 학생회관으로 가는 도중 한쪽 구석에 의자 서너 개를 내놓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덕수를 만났다.
"안녕", "안녕"
가벼운 아침 인사를 서로 나누었다. "환섭아! 총무 되었으면 미리와서 의자를 내놓고 자리를 잡아 놓아야지, 그렇게 하면 언제 장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아침 일찍와서 의자 나르느라고 수고 했다. 미안하다. 내가 이뻐해 줄께."
덕수는 써클회원끼리 아이스크림 장사하는데 미리 장사하기에 좋은 명당자리를 잡아 주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집회 안하고 대동제여, 잉 ! "
"어때 환섭아. 오늘 나랑 같이 시위할래."
"덕수야 어제 집회하고 그랬으니 오늘은 대동제를 하자."
나는 같이 장사하자고 했으나 덕수는 내 말을 들올리가 만무했다.
"오늘 조성만 같은 사람이 또 한번 나온다, 좋은 말 할때 환섭아 ! 자리 옮겨라, 장사 망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라" 고 그는 내게 계속 말하였다. 나는 너무 말이 과장된 것 같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일을 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겠다고 고집하였고, 덕수는 자기가 자리잡은 터를 내게 인도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실 덕수의 말이 맞기는 맞았으나 작년 대동제를 즐겁게 치렀고, 내가 덕수와 함께 시위를 주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속으로는 그의 의견에 찬성했지만 행동으로는 옮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약한 대학생의 표본이 된 셈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등교하는 학생들은 점점 많아지고 여기 저기에서 대동제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나와 몇 명의 친구들은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기 시작 하였다. 신나게 떠들면서 주위에 오고가는 학우들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사라고 소리쳤다.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잘 아는 후배들에게는 그냥 아이스크림을 퍼 주기도 하였다. 몇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덕수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 쪽으로 오더니 자신의 안경을 벗어 친구에게 주면서 "다시 한번 말하는데 제발 다른 곳으로 가라"고 그는 우리에게 부탁하였다. 자신의 말이 들어지지 않을 것 같은지 덕수는, "나는 책임 안진다" 하고 시계탑 쪽으로 가더니 5·18에 대하여 주위의 여러 학우들에게 이야기 하고는 또 다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재속해서 핸드마이크를 손에 쥐고 힘차게 자신의 주장을 외쳤다. 주위의 다른 학우들은 그냥 쳐다 보기만 할뿐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해서 했다. 계속해서 지켜 보던 나는 그가 몹시 안타까워 보였다. 마치 광활한 대지에 한마리 범이 울부짖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메아리도 없는 공허한 벌판에 내버려진 한마리의 작은 호랑이였다.
"가만있지, 너의 힘으로는 너무 벅차"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덕수가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잠시후 덕수는 소주병을 자신의 머리 위에 꺼꾸로 세우고 온몸에 무엇인가를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하면서 의자 위에 있는 잠바를 집어 들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안 할거야!"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덕수는 라이타를 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커다란 불기등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정신없이 덕수에게로 뛰어가서 잠바로 불타는 그의 몸을 마구 털었다. 가장 중요한 얼굴을 잠바로 먼저 감싸고 나서 다독거리면서 머리와 얼굴의 불을 껐다. 그리고는 몸에 붙은 불을 끄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당시 시계는 정상적으로 가는데, 내가 느끼는 불길 잡는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주위의 학우들이 몰려와 같이 불길을 잡았다. 어떤 이는 풍선을 터뜨려 물을 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잔인한 불길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덕수는 누워서 눈을 감고 꼼짝도 안했다. 불이 내 마음대로 빨리 꺼지질 않자 입에서 마구 욕설이 튀어 나왔다. 간신히 덕수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나니 마침 한 학우의 승용차가 있어 덕수를 뒷 좌석에 태우고 나는 앞에 타고 천안에서 가장 큰 순천향 병원으로 향하였다. 덕수는 뒷좌석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신음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덕수야 조금만 참아 병원에 곧 도착한다. 환섭이가 여기 있어."
"환섭아 아파" 하고 내게 통증을 호소하는데 보고 있는 나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어 그저 "조금만 참아라" 라는 말 만을 되풀이 하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덕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 주기도문을 되풀이하여 암송하였다. 자신의 고통을 믿음으로 잊으려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집에는 연락하지마 ! 환섭아 ! 절대로 연락하면 안돼 ! 하고 부탁하였다. 더이상 덕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알았어, 연락 안할께" 라고 했지만 결국에는 연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처럼 천안 시내에 유난히 차가 많게 느껴진 날도 없었다. 차는 순천향병원 응급실 앞에 닿았다. 얼른 차에서 내려 응급실쪽에 대고 소리쳤다. "화상 환자요 화상환자 ! 빨리 나와요 ! " 흰 가운을 입은 2명이 뛰어나와 덕수를 응급실로 같이 옮겼다. 그리고 그들은 덕수를 세척하였다. 상처 부위가 세척기에 닿자 그는 쓰라린 듯 신음을 하였다. 그 소리 또한 내게 고통이었다. 간호원이 불에 탄 덕수의 옷을 벗기려 하자 "아가씨 무언데 내 옷을 벗기려 하는 거요" 하고나서 덕수는 의료진들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하지만 잠시후 간호원이 나오더니 신발, 바지, 잠바를 내게 건내주었다. 바지는 허벅지가 타고 그 부위에 불이 그을려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고 잠바는 긴팔이 반팔로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옷들을 비닐 봉지에 넣으려 하는데 신나 냄새가 진동하였다. 반팔이 되어 버린 잠바가 타는 동안에 덕수에게 주어졌을 고통을 생각해 보니 끔찍하였다. 나중에 이 옷들은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이후부터 꼭 가지고 다녔다.

뒤늦게 덕수의 소식을 듣고 온 학생들, 교직원들의 얼굴빛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우리 써클회원은 어쩌할 바를 몰라 그만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응급실에서 나온 덕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30분이 지난후에 2명만 면회가 허락되어 들어갔다. 전신에 붕대를 감고 두눈만 뜨고 얼굴이 퉁퉁 부은 덕수를 만났다. 분신 당시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는데 지금은 너무 틀려졌다. 나를 알아 보았다. 성경책을 가져와 달라 부탁해서 가져와 마태복음 1장 1절 부터 읽어 주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 " 떨리는 손으로 성경책을 읽어 나가던 나는 목이 메이고 눈물이 고여 더이상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아파서 부탁하는 덕수를 보니, 그만 읽을 수가 없어서 5분 정도 더 읽어 주다가 그와 평소 잘 부르던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러 주고 호남향우회 학우와 같이 조금만 참으라고 격려해 주었다. 덕수는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말을 하였다.
"나는 괜찮으니 나가서 투쟁하라." "그래 알았다." 간호원이 타환자에게 방해 된다고 하여 면회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온 학우들은 병실 밖 복도에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고, 덕수의 화상상태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교직원들과 원장과의 만남이 원장실에서 있었는데 학생으로는 내가 참석하였다. 원장님은 3도 화상에 전신 45%라고 1차진단 결과를 알려 주었다. 경찰에서 계속 전화가 와 지금 병원으로서도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하였다. 시국사건이 생겨서 나도 거기에 참여 하게 된 것이다.
오후 늦게 화상전문 병원인 한강성심병원으로 덕수를 옮기게 되었다. 엠브런스에 교직원, 총학생 회장, 의사 그리고 내가 탑승하였다. 학교측에서 제공한 차량으로 많은 학우들이 서울까지 같이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고온 한남캠퍼스 학우 수백명이 병원 주차장과 주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또 다시 덕수는 응급실로 들어가고 나는 병원 주위를 맴돌았다. 도무지 오늘 있었던 상황에 대하여 믿어지지 않았다. 분덩히 내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내게 악몽같은 현실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친구가 이제는 말도 못하게 되어 병원 칟대에 누워 있다니‥‥‥‥‥
소식을 듣고 온 학우들이 병원으로 모여 주위는 노래·구호 소리로 뒤덮였다. 친구들과 병원 대기실에서 앞으로 덕수 친구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써클회원들끼리 조를 편성하여 항상 병원에는 써클 회원이 남아 있게 되었다. 면회는 가족이외에는 안되었기 때문에 나는 대기실에서 덕수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들을 보면서 그를 생각해 보았다.

'書' 이것이 덕수와 내가 만나게 된 매개체가 된다. 87년 3꿜 서도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그는 잘 다려입은 양복을 입고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소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학과, 이름을 말하고 자기 생일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써클에서 잘해 달라고 당당한 모습으로 신입생답지 않게 말했다. 무척이나 소극적이던 나는 '어떻게 처음 대하는 자리에서 저런 맡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덕수를 써클에서 만나 각자 신상 소개를 자세히 하고 동기 회원으로서 잘 지내게 되었다. 작년 6월달에 덕수는 매일 가투를 다녀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나에게 들려 주었다. 전경들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는 도중 최루탄에 입은 상처는 6월달에 얻은 그의 훈장이다. 2학기 개강을 하고서는 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선봉이 되고자하여 '87 평의회'라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래서 그해 가을 작품전에는 붓글씨를 쓸 기회가 없어 자신의 작품을 못 내었다. 하지만 서도회에 새로운 신입생들이 들어 오면 자신이 나서서 써클 전반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를 자청 하였다. 대통령 선거때는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열심히 뛰기도 했다.
12월 17일, 대통령 선거가 민주진영의 참패로 끝난뒤 그를 오후에 학교에서 만났는데 그는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분개 하였다. 당장 서을로 올라가 뒤엎어 버리겠다고 분에 못이겨 울분을 토했다.
겨울 방학에는 자신의 사상을 새로이 하려고 집으로 내려갔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성탄절 인사를 하기에 서울에 온 줄 알았더니 덕수는 정주라면서 자기집에서 키우는 닭 울음 소리를 들려 주는등, 엉뚱한 면이 많은 친구였다. 휴학을 하고 난 후 체육관을 짓는 공사촌에서 번 돈을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쓰기도 하고 인천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인천으로 불러 술을 마시며 자신이 겪고 있는 공장 생활에 대하여 조금썩 일러 주었다. 써클 선배가 군입대 하게 되어 함께 논산 훈련소까지 가기도 하는등 자신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을 나눠주는 친구였다.

"긴급히 알려 드립니다. 최덕수 학형의 심장이 일시 멎어 아주 위독한 상태입니다." 5월 26일 1,2교시 수업을 마치고 인문학관을 나오는데 병원으로 학우들이 가 줄 것을 호소하는 총학생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심장이 멎었다니 ‥‥‥‥. 나는 학생회관 앞으로 가 보았으나 이미 서울행 버스는 떠나고 없어 홀로 기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약 한시간 정도 소요되는 시간인데도 기차 안에서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고 조바심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중환자실로 통하는 입구에서는 학우들의 출입을 통제 하였으나 나는 덕수의 친구라는 이유로 중환자실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수명의 의료진이 덕수의 주위에서 계속해서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오전에 호흡이 멎어 기도를 잘라 호스를 연결시키고 병원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쓰고 있었다. 꼼짝 못하는 덕수를 때리고 주므르고, 지켜보기에 안타까웠다. 간호원들이 수시로 움직이고 의료진들의 표정은 자꾸만 굳어져 갔다. 보호자 이외에는 중환자실에 들어 올 수 없다 하여 문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상태는 오후 4시까지 계속 되었다. 잠시후에 덕수 앞쪽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보호자가 나오더니 내게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 의사들이 기계의 스위치를 모두 껐어요"
"하지만 ‥‥‥‥‥ 아니야 ‥‥‥‥."
덕수의 부모님을 의사들이 부르더니 조금 있다가 아버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나오셨다. 의사들이 덕수를 일으켜 세웠는데 덕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얼굴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주위의 학우들은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긴밤 지세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 보다 더 고은 아침 이슬 처럼 ‥‥‥. " 노래 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려 퍼졌다.

아니야 ! 그럴리가 없어 ! 이것은 꿈이야 ! 꿈 ! 하지만 그 꿈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이 글은 열사께서 분신한 해 교지'단국'에 실린 글입니다.